독자의 삶

[중혁독자] 讀者之生 독자의 삶 7 (완)





독자지생 7




독자의 삶은 여기에 있었지만 김독자는 없었다. 텅 비어버린 책이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이야기했다. 한수영이 옳다. 겨우 이런 이야기에 매달려 스스로를 망치는 건 멍청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왜 책을 덮을 수 없을까.

내려야할 역은 이미 지나쳤다. 유중혁은 이수경의 책 대신 백지가 된 ‘독자의 삶’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보고 싶었다. 이야기인 척 하는 김독자가 아니라, 진짜 김독자가. 그러나 김독자는 이미 죽은 인간이었다.


“이상한 이야기 읽고 있네.”


어린 남자 아이가 유중혁의 옆에 앉아 ‘독자의 삶’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백지인 책을 보고 아이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그치만 재미없지 않아? 세상에, 저렇게 재미없는 삶을 살다니, 심심한 주인공이야.”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얄미운 소리를 하는 아이에게 날선 말투로 반박했다. 열차가 덜컹거렸다. 깜빡, 내부조명이 잠깐 점멸했다고 느꼈다. ……착각이었는지 전철 내부는 여전히 밝았다.


“형은 주인공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좋아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후후.”


아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환하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 만나게 해줄까?”

“뭐?”

“보고 싶잖아.”

“김독자와 만날 수 있다고?”

“응.”


악마가 속삭이는 거짓 진리, 불가능한 법칙을 아이는 해맑게 내놓았다. 거절한다. 당연하다. 그런데도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하철 내부 조명이 다시 한 번 깜빡거렸다.


“볼 수 있다면.”

“그 대신 평생을 바칠 수 있어? 영원히?”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습다. 말도 안된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젓지 않았다. 아이는 유중혁의 다리에 매달리며 끈질기게 물었다.


“형은 여러 갈래로 찢겨 영원히 반복할 거야. 정말로? 정말로 만나러 갈 거야?”

“그래.”


바지를 잡고 있던 작은 손에 힘이 풀렸다. 먼저 제안을 해놓고 이런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아이의 얼굴이 창백했다. 재미없는 선문답이었지만 속은 시원했다. 뭐가 그리도 서러운지,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아이를 달래려 손을 뻗은 순간 아이는 희미해지면서 사라졌다.




지독한 꿈이었다. 유중혁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봤다. 그래, 집에 가고 있었다. 집에 가서 유미아에게 밥을 해주고 다음 시즌 대회를 대비해서……. 그 순간 유중혁의 눈에 객실 번호가 보였다. 


‘3707’




작가의 기질은 저주와도 같아서 자신의 비극조차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로 만든다.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공이자 작가가 되어 평생 엔딩을 향해 이야기를 써내린다.




[제 8612 행성계의 무료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되었습니다.]


<메인시나리오 # 1 — 가치 증명>


분류: 메인

난이도: F

클리어 조건: 하나 이상의 생명체를 죽이시오.

제한시간: 30분

보상: 300 코인

실패시: 사망







빌어먹을 유중혁. 여태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한수영은 유중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


짜증을 내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깟 책 버리라고 했다고 잠수를 타? 직접 만나 눈앞에서 책을 찢어버릴 테다. 학과 건물에 들어서 강의실 앞을 기웃대던 한수영은 동기를 발견했다. 그녀도 한수영을 발견했는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야, 한수영! 여행간다고 휴학하더니 어쩐 일이야?”

“신경 끄고, 유중혁 어디 갔냐?”

“유중혁?”

“걸리기만 해봐, 죽여버릴 거니까.”


한수영이 투지를 불태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기억을 되짚었다.


“유중혁이 누구야,? 네 남친?”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유중혁을 모른다고? 농담해? 유중혁이 나한테 말하지 말라고 하고 튀었어?”

“아니, 진짜 누군데?”

“너, 나, 우리 동기잖아! 얼굴 잘난 그 새끼!”

“우리 학과에 잘생긴 남자는 없다. 있었으면 나는 여기 없고 걔 옆에 있었겠지.”


한수영은 당황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 못할 정도로 뇌가 굳는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동기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한수영은 자리를 박차고 학교를 벗어났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유중혁 이 새끼 어디 갔어? 증발이라도 했는지 유중혁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름 석 자, 잘생긴 얼굴, 그가 썼던 세계,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이성이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유중혁을 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기껏해야 생각나는 거라곤 ‘독자의 삶’ 빌어먹을 책뿐이었다.

한수영이 지하철로 내려가려는 그 때 메시지가 도착했다. 스마트폰을 꺼내자 화면에 메시지가 보였다.


‘작가님, 이번 작품 호응이 아주 좋아요. 벌써 순위권에 올랐네요. 역시 믿고 보는…….’


맥이 빠졌다. 한수영은 애써 웃으면서 소설을 연재하는 사이트에 접속했다. 베스트 순위에 자신의 작품이 올라온 걸 확인하고 앱을 종료하려고 할 때였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그 소설이 눈에 띄었다. 넘쳐나는 판타지 소설들, 뻔하고 뻔한 소설 중 하나였다. 이미 누가 읽었는지 조회수는 1이었다. 한수영은 별 생각없이 첫회를 눌렀다.


“하……….”


문장을 몇 줄 읽다가 사이트를 종료해버렸다.


“유중혁, 이 미친 새끼.”


개같은 소설을 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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