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우결알 H2 [중혁독자] Still on game

중우결알에 나올 신간 샘플입니다.








[애초에 너랑 게임하지 말걸 그랬어.]

그렇게 말했다.

[덕분에 진저리가 나.]

녀석은 아무 말도 없었다.

[후회해.]

후회했다.

[내가 사라져준다. 개자식아.]

그렇게 말하지 말걸…….



김독자는 꿈을 꿨다. 조금 옛날 꿈이었다. 눈물이 옆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것 아니었는데도 당시에는 어찌나 서러웠던지. 잠깐 사색할 시간도 주지 않고 알람이 울렸다. 그래그래, 출근해야지. 김독자는 눈물을 닦고 몸을 일으켰다. 침대를 짚고 상체를 일으키려던 순간 머리를 당기는 고통에 도로 누워야했다.

“악!”

김독자는 머리를 부여잡고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아픈 곳을 문지르며 주변을 보니 백금색 실타래가 널려있었다. 이런 걸 침대에 널어놓고 잤나? 그럴 리가 없다. 김독자는 그걸 손으로 잡아 문질렀다. 촉감은 어쩐지 머리카락 같았다. 어쩐지 소름이 돋아 침대에 내던졌다. 목덜미에 간질이는 무언가 느껴졌다. 똑같은 것이 가슴께로 내려와 백금색을 빛내고 있었다.

“어?”

김독자는 침대에서 뛰쳐나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엔 머리가 긴 백금발인 누군가가 있었다. 김독자 자신이었다. 자신의 얼굴이 아님에도 어쩐지 원래 얼굴이 남아있어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이건 자신이라고. 김독자는 스스로 뺨을 꼬집었다. 아직 꿈이 아닐까 싶어 볼을 꼬집고 비틀며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해보였지만 남는 건 얼얼한 뺨뿐이었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하루아침 사이에 사람이 변했다. 병이라도 걸렸나? 외계인의 소행인가? 세상이 뒤집혔나? 김독자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김독자가 변해도 아침 해는 떠오르고 지하철은 운행한다. 고로 출근해야한다는 뜻이다.



✦✦✧



상사가 보면 반항하는 거냐고 잔소리할 머리였지만 김독자는 월급을 위해 출근했다. 집에 굴러다니는 노란 고무줄이 있어 급하게 묶고 나왔다. 그런다한들 죽을 색이 아니었다. 화려한 백금색은 생각보다 시선을 끌었다. 출근 시간에 바쁘게 출근이나 할 것이지, 한가하기 짝이 없다. 김독자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평소처럼 웹소설이나 읽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웹소설 어플리케이션이 아니라 인터넷을 눌렀다.

‘멸망할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

그렇게 검색하고 김독자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망겜, 빌어먹을 망겜. 망했지만 서비스를 하고 있는 여느 게임과는 달랐다. 글자 그대로 서비스를 종료했다. 그것도 어제.

‘멸망할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 줄여서 멸살법은 비인기 온라인 RPG 게임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열심히 했던 게임이었다. 스크린 도어에 김독자의 모습이 비춰졌다.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자기 모습은 현실감이 없었다. 김독자는 그 게임에서 이런 모습을 한 캐릭터로 플레이했다. ……서비스 종료 전에 그만뒀지만.

지하철이 스크린 도어 너머로 들어왔다. 앞머리가 흔들렸다. 곧 스크린 도어가 열리고 김독자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도 그랬지만 안에서도 눈에 띄는 색이었다. 김독자는 대충 구석에 몸을 구겨 넣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어쩌면 이건 멸살법과 관련된 일일지도 모른다.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김독자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재미없는 상상이었다. 그때 누군가 김독자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밝은 갈색머리를 옆으로 땋아 내린 키 큰 여자였다.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유상아 씨?”

“김독자 씨죠?”

동시에 떠오르는 사람이 또 있었다.

“대머리깎아라님?”

“삼대독자님?”

그녀는 놀랍게도 직장 동료이면서 같은 성운 사람이었다. 화려하게 생긴 두 사람이 모여 있으니 배로 이목을 끌었다. 주목받는 건 신경 쓰이지 않는다. 지금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대머리(…)깎아라님……. 유상아 씨였다.

“우리가 같은 게임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그래요. 게다가 같은 성운이었다니…….”

“그나저나 상아 씨는 어쩌다가 그런 모습으로?”

“말도 안 되지만 자고 일어나니 이 모습이었어요.”

그녀도 모르는 눈치였다. 아, 멸살법……. 이 망할 게임……. 이미 망한 게임이지만.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소설 같은 일이다.

옥수역으로 접어들자 바깥이 보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생각을 정리했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건지……. 그러면서도 확신이 생겼다. 이건 멸살법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동호대교 위를 달리는 열차 안에서 김독자는 한숨을 쉬었다. 창 너머 강을 보며 한숨 쉬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시 한숨을 내뱉으려 하자마자 차체가 크게 흔들렸다. 굉음이 울리며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창문이 알 수 없는 물체로 가려졌다. 거무튀튀한 그것은 비늘로 이루어져 있었다. 파충류? 어류? 확실한 건 저게 괴물이라는 거다. 괴물 때문에 열차가 급정거하고 사람들이 우르르 넘어졌다. 김독자와 유상아는 중심을 잡아 넘어지지 않았다. 그 자체로 기시감이 들었다. 패닉에 빠진 사람들 사이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열차를 조이던 괴물의 길쭉한 몸체가 강으로 떨어졌다. 물기둥이 높게 솟구치고 선홍색 액체가 유리창 위로 흘렀다. 반대편 창문에서도 다른 몸체가 천천히 강으로 떨어졌고 물기둥이 하나 더 올라왔다. 김독자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지하철 위로 저벅저벅 걷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옆에 통통 튀는 가벼운 발걸음도 함께였다.

“잘 도와줬지? 거래한 대로 닉변권은 내 거야.”

“그래라.”

“아, 외변권은 언제 나오는 거야?”

성인 남자와 소년의 목소리였다. 닉변권? 외변권? 게임에서나 익숙하고 현실에선 생소한 단어다. 김독자는 유상아를 돌아봤다. 그녀도 그 대화를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뻐끔거리는 입술이 말했다.

‘위로, 올라, 가요.’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람들을 지나쳐 의자 옆에 쪼그려 앉았다. 수동개폐장치 뚜껑을 열어 레버를 작동시켰다. 두 손으로 문을 열자 유상아가 김독자의 옆에 섰다. 뒤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지만 김독자가 알 바 아니었다. 솔직히 미친 짓이지만 근거 있는 자신감이 치솟았다. 두 사람은 자리를 박찼고 다행히도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열차 외벽을 기어올라 열차 위에 도착했다. 그 위에는 이미 두 사람이 있었다. 노란 후드를 뒤집어 쓴 어린 남자애와 검은 코트를 입은 성인 남자.

“유중혁.”

코트를 입은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아이도 김독자를 쳐다봤다.

“그리고 타락신관수영.”

“아악!”

후드를 눌러쓴 남자아이가 소리쳤다. 통한이 담긴 비명소리였다. 자세히 보니 눈 색이 특이했다. 한 쪽 눈이 선명한 적색이었다. 유중혁이 뭐라 하기도 전에 타락신관수영이 김독자에게 달려들어 머리채를 쥐어틀었다.

“아아악!”

“닉! 바꿀 거라고! 나도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런 닉네임 안 지었어! 지는 삼대독자인 주제에!”

“아! 이거 놔! 타락신관수영님아! 평소에 컨셉 잘 지켰으면 밖에서도 당당하게 지켜!”

“진짜 죽여 버린다!”

하필 머리가 길어서 딱 잡히기 좋았다. 김독자는 그렇게 한참동안 머리를 뜯겼다. 유상아가 두 사람을 말리려 가까이 다가가자 타락신관수영이 유상아에게 삿대질을 했다.

“쟤!”

유상아가 어리둥절해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쟤 닉네임도 만만치 않은데 왜 나한테만 난리들이야!”

대머리깎아라……. 확실히 대단한 닉네임이다. 시선이 몰리자 유상아는 빙긋 웃으면서 답했다.

“닉네임 여덟 글자 제한에 걸려서요. 원래 닉네임은 ‘꼰대놈들 대머리 깎아라’예요.”

그건 몰랐다. 하지만 통쾌한 닉네임이었다.

“취지가 좋잖아. 봐주자 수영아.”

“대체 뭐가?”

그들이 닉네임 하나로 언쟁하는 동안, 그걸 시답잖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한발자국 다가왔다.

“한수영.”

“왜!”

“이만 가지?”

“얘네는 어쩌고?”

“필요 없다.”

여전히 김독자의 머리채를 쥐고 있는 타락신관수영, 한수영이 유중혁을 쳐다보다가 다른 두 사람을 쳐다봤다.

“우리 성운 애들 다 모으는 거 아니었어? 그럼 얘네도 데려가야지.”

“그 닉네임으로 계속 있고 싶은 건가?”

“씨발.”

그 말을 듣자마자 한수영이 김독자의 머리를 놓았다. 그제야 김독자는 유중혁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보고 있지 않았다.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김독자도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에 있던 한수영이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근데 독자 놈은 그렇다 치고, 대머리는 상관없지 않아?”

“……마음대로 해라.”

그 말을 남기고 유중혁은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김독자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뭐, 유중혁이 저래도 할 말 없지?”

한수영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김독자는 아무 말 없었지만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한수영은 혀를 차고 유상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대머리.”

“그렇지만…….”

유상아가 김독자를 쳐다봤다. 그를 홀로 두고 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독자는 그 마음을 알아채곤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저는 괜찮으니 따라가 보세요.”

“그럼…… 이따 연락드릴게요.”

김독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음이 좀 놓였는지 그녀는 한결 나아보였다. 유상아는 한수영의 손을 잡으며 단단히 일렀다.

“제 이름은 유상아예요, 타락신관수영님.”

“너도 닉변권부터 구하던가.”

한수영은 씨익 웃으면서 유상아의 손을 꽉 잡았다. 두 사람도 열차에서 뛰어내리고 김독자는 그 위에 홀로 남았다.

‘유중혁이 저래도 할 말 없지?’

……그래, 할 말 없다. 그 녀석이랑 내가 할 말이 뭐가 있다고. 동호대교 위에서 만난 녀석은 여전히 싫은 놈이었다.


(중략)


이지혜는 유중혁이 김독자를 쫓는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을까? 그녀는 뺨을 긁적였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이 도착한 곳에 거대괴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사장님 쫓아온 게 아니라 몬스터 잡으러 온 거잖아? 이지혜는 툴툴거리면서 성운 채팅 채널을 열었다.

명량핫도그 <미노소프트 사옥 주변에 자이언트 트롤 떴어요. 오실 수 있는 분?>

불로칼베기 <지원이요? 혼자 있어요?>

명량핫도그 <아뇨, 사부랑요.>

한수영 <그럼 갈 필요 없잖아.>

명량핫도그 <어디 계신데요?>

대머리깎아라 <그 주변에서 저랑 점심 먹고 있어요.>

명량핫도그 <그러면 와서 좀 도와요;;>

한수영 <싫은데?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거든?>

복덕공자 <쇼를 해라, 쇼를 해. 나랑 탱해는 쎄빠지게 구르고 있는데 밥이 넘어가?>

한수영 <하고나서 밥 먹든가.>

복덕공자 <나와 인마! 한 판 붙어!>

탱해드립니다 <두 분 싸우지 마십시오!>

“사부…….”

“봤다.”

하긴, 못 봤을 리가 없다. 이지혜는 체념하곤 검을 꺼내들었다.

“이지혜, 이 정도로 소집할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들은 뒀다 뭐해요?”

유중혁은 말없이 인벤토리에서 거궁을 꺼냈다. 본인 키보다 큰 거궁의 화살은 미사일처럼 보였다. 버스정류장 지붕 위에 서서 괴물을 겨냥했다. 괴수는 건물을 부수며 그 위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아직 인명피해는 없어보였다. 사람들이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지만 몬스터 제압이 우선이었다. 그가 시위를 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잠까아아안!”

다행히 활시위를 놓치는 실수는 없었다. 유중혁은 아래를 내려 봤다. 김독자였다. 뛰었는지 앞머리가 조금 흐트러져있었다.

“잠깐만! 잠깐만 있어봐!”


(중략)


[선택받은 자]

멸망으로 치닫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 선택받은 자. 그대여, 멸망한 세계를 구해라. 선택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기초 퀘스트.

분류: 튜토리얼

클리어 조건: 하나 이상의 몬스터를 격퇴

제한시간: 없음

보상: 기초 무기 랜덤 상자

실패 시: 패널티 없음


멸살법……. 망할 멸살법……. 차라리 꿈이라고 해줘. 김독자는 테이블에 머리를 숙여 이마를 여러 번 찧었다. 이래서야 진짜 게임 같잖아.

“사장아, 튜토리얼 안했냐? 도와줄까?”

“됐어, 꺼져…….”

붉은눈이고 유중혁이고 전부 지긋지긋하다. 멸살법 이 망겜……. 결국 모든 원인은 멸살법이란 거잖아. 개 같아서 접었더니 현실로 튀어나오네? 김독자가 좌절하든 말든 붉은눈은 신경쓰지 않았다.

“제일 잡기 쉬운 게 식물형 몬스터인데 말이야? 크, 감사하라고? 이 몸이 네펜데스 군락지를 잘 알고 있으니. 사장 넌 땡잡은 거야. 야, 사장아. 안 기뻐?”

붉은눈이 어깨를 흔들며 깨웠지만 김독자는 죽은 듯이 엎드려있었다. 갑자기 출근하고 싶어졌다. 세상에, 출근하고 싶은 회사원이라니. 세상이 진짜 망하려고 그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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