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

[그분걔] 천명(天命) 01

가볍게 쓰는중입니다 ^^;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PydfefMY8GQ

 

 

 

태초에 하늘이 열리고 두 존재가 생겨났다. 서녘에는 용, 동녘에는 범. 두 존재는 동서를 갈라 세계를 지배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을까. 두 위대한 존재의 아래에 한 줌의 흙이 나타났다. 무저갱에서 솟아났는지 공허에서 떨어졌는지 모를 흙 한 줌은 동쪽과 서쪽의 경계에 있었다. 그 흙을 두고 위대한 존재들은 소유를 논했다. 그들은 서로 자신의 땅이라 주장하며 한 줌씩 흙을 놓았고 점점 쌓여가는 흙에 한 줌의 땅은 섬이 되고 대륙이 되고 별이 되었다. 두 존재가 놓은 흙에 영험한 기운이 서려 생명을 창조했다. 드넓은 땅 위를 푸른 생명이 뒤덮고 짐승이 꿈틀대며 뛰어 놀았다.

하지만 흙이 한 줌씩 놓일 때마다 상반된 기운이 튀어올랐다. 세계의 균형은 요동치는 천칭처럼 양옆으로 기우뚱거렸다. 두 존재는 그제야 땅이 버티지 못함을 깨달았다. 상극인 기운이 만들어낸 세계는 더 필요한 것도 모자란 것도 없었다. 그들이 계속해서 땅의 소유를 주장하면 아름다운 한 줌의 흙은 먼지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 용과 범은 발톱을 숨기고 애착으로 물든 땅을 위해 서약했다.

한 줌의 흙을 소유하지 말되, 아끼고 보듬어야 한다.

그리하여 한 줌의 땅은 두 신의 보호 아래 굳건하리라.

 

부토(抔土)설화 『한 줌의 흙』

 

 

 

오호통재라, 대대로 명장을 배출해온 무장명가 유씨집안의 독자께서 어찌 천살대군의 아래로 가게 되었는가. 궐 안이 소문으로 들썩였다. 소문의 주인공인 유 가문의 독자(獨子) 유중혁은 묵묵히 양하대군이 기거하는 연우궁으로 향했다. 현호국에는 아직 세자가 없다. 아니,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양하대군이 있음에도 관료나 백성이나 서자인 예선군을 옹호했다. 나이가 같은 두 왕자, 적자인 양하대군이 외면받는 이유가 무엇 있겠는가? 말과 소문과 추측으로 점철된 대군의 앞에는 다른 호칭이 붙곤 했다. 불길한 별 아래에서 태어난 귀한 몸. 그 이름 천살대군, 흉성, 파군성, 요광. 요사스러운 별빛에 붙은 온갖 이름들이 양하대군에게 붙었다. 양하대군의 연우궁은 피가 마를 날이 없다며 궁인들이 함부로 입을 놀렸다.

불길한 별을 가진 왕자, 사람을 죽이는 빛, 그 요광에 현혹되면 빛을 빼앗겨 죽어버린다며 사람들은 연우궁을 꺼렸다. 실제로도 연우궁에서는 궁인들이 죽거나 사라진다. 그런 까닭에 연우궁엔 궁을 지키는 금군과 궁을 돌보는 시종이 열을 넘지 못했다.

유중혁에게 사실여부는 상관없었다. 양하대군이 어떤 자든, 그를 지키는 일만 해내면 그만이다. 유중혁은 부친의 말을 떠올렸다.


‘검을 내려놓거라.’


그 말이 족쇄처럼 그를 얽매려 들었다.


‘지키지 마라. 지킬 필요 없다. 조용히 있다 돌아오거라.’


이름뿐인 호위무사가 되라는 말에 유중혁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그 눈은 타올랐다. 유중혁이 걸을 때마다 패용한 칼이 함께 흔들렸다. 손잡이에 덧댄 가죽은 낡아서 너덜너덜했지만 칼집에 담긴 날은 날카로웠다.


“좌익위십니까?”


체구가 작은 여인이 유중혁에게 물었다. 그가 그러하다 대답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 오시지요.”


앞서 걷는 여인은 옥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비교적 지위가 높은 궁녀처럼 보였으나 어째서인지 여인은 어리다 싶을 정도로 젊었다.

의문스러웠지만 중요하게 눈여겨 볼 일은 아니었다.

연우궁에 가까워질수록 조용해졌다. 사람의 말소리 대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질척한 악의 대신 고요한 정적이 허공을 채웠다. 너른 뜰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노송은 허리를 숙여 연못을 들여다보았고 그 속에는 개구리, 올챙이, 잉어, 송사리, 흰뺨검둥오리, 종을 가리지 않고 모여 있었다. 좋게 말하자면 어우러져 있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관리를 안 해서 개판이었다. 궁녀가 시선조차 주지 않는 걸 보니 평소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세자가 기거하는 궁이다. 병졸은커녕 궁녀 하나 보이지 않으니, 어찌된 영문인가.”

“좌익위께서는 어찌 목숨을 아끼지 않으십니까?”

“직무 태만인가.”


여인은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싱긋 웃는 낯으로 뒤돌아 유중혁을 똑똑히 바라봤다.


“연우궁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 이외에는.”


웃는 얼굴이었으나 그 속내가 얼음장 같았다.


“아기궁녀 하나는 도망가고 마침 있던 금군 둘은 나흘 전에 죽어버렸으니 남은 건 저뿐이지요. 아, 굳이 따지자면 양하대군께서도 계십니다만…….”


늘인 말 뒤에 숨긴 말은 숨겨지지 않았다. 그녀가 불손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분을 사람이라 칭해야겠습니까?”


저 눈을 어찌 해석하면 좋을까. 유중혁은 당혹스러웠다. 엄연히 왕실모독죄였다. 인적이 없다한들 궁 한복판에서 이런 언사라니?


“여기는 세자께서 기거하시는 연우궁의 양현당이지요.”


그녀가 신발도 채 벗지 않고 댓돌을 밟고 마루에 올랐다. 유중혁은 신발을 벗어두고 성큼성큼 걷는 궁녀를 뒤쫓았다. 여인이 안에 아뢰지도 않고 대뜸 문을 벌컥 열어 재꼈다.

그러자 누군가 안쪽에서 바깥으로 굴렀다. 문에 기대고 있었는지 열자마자 딸려 나왔다. 유중혁은 빠르게 무릎을 굽혀 마른 소년을 품에 안아 받았다. 그 모습을 보던 궁녀는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를 갖춰보시지요. 이 나라의 국본, 세자 저하십니다.”


품에 안긴 아이는 작고 여리고 부드러웠다. 사람들은 이런 아이를 천살대군이라는 살벌한 칭호로 부른단 말인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둘을 내려다보던 궁녀는 본보기 같은 자세로 허리를 굽혀 예를 갖췄다.


“소녀는 진가의 수야라고 합니다. 앞으로 며칠간 뵙게 될 것 같으니 이름을 밝힙니다. 할 일이 많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러곤 마루를 지나왔던 길로 돌아갔다. 수야라는 궁녀가 점점 멀어져 보이지 않는데도 유중혁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해도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유중혁은 품에 안긴 양하대군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아이가 옷깃을 잡고 늘어졌다. 떼어내고자 한다면 손쉽게 떼어놓을 수 있지만, 벌벌 떠는 아이를 품에서 떼어놓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유중혁은 한숨을 쉬고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뭐가 그리 무서워서 떠는 것일까. 자신인가? 그도 아니면 궁녀? 둘 중 누구도 세자가 두려워할만한 인물은 아니다. 유중혁은 양하대군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늘부터 대군을 모시게 된 좌익위 유중혁입니다.”

“…….”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궁녀가 말한 것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악담에 익숙한 모양이었다. 익숙하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는 건 아니다. 차라리 성이라도 낼 것이지……. 반응이 없었다. 가슴 속이 곪을 대로 곪은 것처럼 보였다.


“당신은…….”


말하고 싶은 것이 많아 보였지만 아이는 입술을 앙 물고 그대로 도망쳤다. 버선발로 맨바닥을 달리는 모습에 넋을 놓았다가 급하게 쫓아갔다. 흙이 버석버석 밟혔다. 유중혁도 당황한 나머지 버선발로 따라간 것이다. 아이는 얼마 가지 못해 유중혁에게 따라잡혔다. 체력이 부족한지 뛰다가 지쳐 헉헉대며 소맷자락을 허우적거리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흐읏, 흑, 우욱.”


굵은 물방울이 아이의 눈에서 뚝뚝 떨어졌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아이는 울고 있었다.


“왜 우십니까.”


유중혁은 아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엄지로 눈물을 훔쳤다. 왕족에게 함부로 손을 댔다는 자각보다는 아이를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코끝이 빨개진 아이가 훌쩍이면서 중얼거렸다.


“내 곁에 있으면 죽을 거야.”


아이가 눈을 내리깔며 유중혁의 눈을 피했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점점 늘어갔다. 놔뒀다가는 경기라도 일으킬 것 같아 걱정되었다. 작은 정수리를 보면서 유중혁은 입을 열었다.


“자주 들어본 말입니다.”

“어, 으응?”

“죽을 거라는 말. 그러니 괜찮습니다.”


그 말에 아이가 고개를 쳐들었다. 이해를 못해서 어리둥절한 눈이 부정적인 말을 뱉는 입보다 마음에 들었다. 유중혁은 아이를 안아 들었다. 갑자기 높아지는 시야에 아이는 당황해서 버둥거렸다.


“가시고자 하는 곳이 있으시다면 모시겠습니다.”


정처없이 도망친 사람에게 갈 곳을 묻는 모습에 양하대군은 말을 잃었다. 잠시 가만히 안겨있다가 유중혁의 옷깃을 손에 꾹 쥐었다.


“……돌아갈래.”


유중혁의 가슴에 기댄 양하대군은 작고 물렀다. 누가 이런 아이를 불길한 별의 이름을 붙여 불렀을까.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명칭이다.

아이의 숨소리가 색색 들렸다. 깊고 규칙적인 호흡을 듣자니 잠이 든 모양이다. 아이가 깨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단단히 붙잡아 받쳤다.

작은 발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그 발바닥에서 흙이 바스스 떨어졌다. 아이의 버선도 유중혁의 버선도 거뭇거뭇해져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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